본문

상주의 연혁

 

1. 문헌상의 기록

 

 

尙州沾解王時 取沙伐國爲州 法興王十一年梁普通六年 初置軍主爲上州云云 景德王十六年 改名尙州 今因之 

(三國史記, 地理1尙州)

 

상주(尙州)는 신라 첨해왕(재위 247~261) 때에 사벌국을 취해 주로 삼았다. 법흥왕 십일 년에 처음으로 상주(上州)에 군주를 두었다. 경덕왕 십육 년(재위 742765, 756)에 상주(尙州)라는 이름으로 고쳐 지금에 이른다(삼국사기).

 

 

尙州牧本沙伐國 一云沙弗 新羅沾解王取以爲州 法興王改尙州置軍主 眞興王改上洛郡 神文王復爲州 景德王改今名 

(東國輿地勝覽28, 尙州沿革)

 

상주목은 본래 사벌국이다. 사불이라고도 한다. 신라 첨해왕 때에 취해 주로 삼았다

법흥왕 때에 지금의 이름인 상주(上州)로 고치고 군주를 두었다. 진흥왕(재위 540~576) 때에 상락군으로 고치고 신문왕 때에 다시 주()로 하였다. 경덕왕(재위 681~692)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동국여지승람). 

 

尙州牧本沙伐國 一云沙弗 新羅沾解王取以爲州 法興王十一年梁普通六年也 改尙州置軍主 眞興王改上洛郡 神文王七年 唐垂拱三年也 景德王改今名 築城周一千一百九步復爲州 景德王改今名 惠恭王復爲沙伐州 (商山誌, 沿革)

 

 

 

상주목은 본래 사벌국(사불이라고도 한다)이다. 신라 첨해왕이 취해 주()로 삼았다. 법흥왕 십일 년(525)에 상주(上州)로 고치고 군주를 두었다

 

진흥왕 때에 상락군으로 고쳤다. 신문왕 7년 주위에 일천 일백 구보로 성을 쌓아 다시 주()로 하였다

경덕왕(재위 681~692) 때에 지금의 이름인 상주로 고치고 혜공왕(재위 765~780) 때에 다시 사벌주라 하였다(상산지).

 

 

 

2. 상주(上州)

 

 

상주(尙州)의 지명이 사벌주에서 상주(上州)로 변경되었음을 앞선 문헌 자료에서 확인한 바 있다. 먼저 상주(上州)로 변경되었을 당시의 정치군사적인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지명 변경의 중요한 사유가 될 수 있다.

 

신라 지증왕 때부터 시작한 지방 조직의 개편은 통일 이전의 52소경으로부터 통일 이후인 685(신문왕 5)95소경제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경덕왕 때에 중국식으로 지명 등을 고친 것이 일반적인 사실이다.

 

삼국사기지리지 상주조에 의하면 서기 525년 법흥왕 11년에 상주에 처음으로 군주를 두고 상주(上州)를 설치하였다는 상주(上州)에 대한 첫 기록이 있다. 또한 삼국사기신라본기 5252월 초에는 대아찬 이등을 사벌주의 군주로 삼았다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같은 해이기에 상주와 사벌주의 명칭은 논란을 삼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다만 정식 지명이 상주(上州), 상락(上洛), 상주(尙州)로 바뀌어도 여전히 사벌이란 명칭이 오랜 기간동안 사용된 것만은 여러 문헌자료를 통하여 볼 때 분명하다. 525년부터 사용된 상주(上州)란 명칭은 757(경덕왕 16)까지 230여 년 동안 상주(尙州)의 명칭이었다.

 

보다 전체적인 상황에서 상주(上州)가 설치된 것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통일 이전 신라 5주는 실직주(505, 삼척)를 필두로 상주(上州)(525, 상주), 신주(新州)(552, 경기도 광주), 하주(下州)(555, 창녕), 비열홀주(556, 강원도 안변)가 차례대로 신설되었다. 이는 신라 국력 신장에 따라 편입된 지역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고 이후 고구려, 백제, 가야 등과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지방 행정군사조직이라 할 수 있다. 서라벌을 중심으로 한 수도 지역에 있던 대당(大幢)(544, 진흥왕 5)에 이어 서기 552년에 상주정(上州停-673년에 귀당貴幢으로 명칭 변경)이 설치되었다(삼국사기 지리지). 이후 685(신문왕 5)까지 한산정(신주), 우수정(비열홀주), 하서정(실직주), 완산정(하주)6정이 성립되었다.

 

이처럼 신라는 5주에 6정을 두어 각 지역의 군사적인 업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진덕여왕 2(648)에 김유신 장군을 상주행군총관(上州行軍摠管)으로 임명하여 백제와의 싸움에서 상주가 중요한 전방의 기지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태종 무열왕(660)이 김유신, 품일, 흠춘의 군사를 백제 정벌을 위해 출전시키고 자신은 현존 최고(最古)의 석성(石城)인 금돌성에서 37일간 머물다가 백제 의자왕의 항복 보고를 받고 백제 소부리성으로 떠났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다. 통일 이전에도 백제와의 주요 전쟁에서 중요한 베이스캠프의 역할을 하였던 상주정은 이후인 문무왕 13(673)에 귀당(貴幢)으로 승격된다. 통일 신라 초기의 군사 편제는 당()과 정()인데, 경주 등 수도권을 담당하던 지방군사조직인 대당(大幢)과 더불어 상주 지역이 신라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의미한다.

 

 

상주는 본류와 영강, 내성천, 이안천, 위천 등의 물이 한 데 합류하여 배가 드나들 만큼 큰 강의 흐름이 상주에 와서 비로소 시작된다. 이를 통해 상주는 신라의 젖줄이기도 한 낙동강의 큰 흐름이 시작된 명칭의 의미로 상주(上州)라 하였다고 생각한다. 이는 낙동강의 하류 지방인 경남 창녕 지방의 군사 조직을 하주(下州)라 한 것과 일치한다. 상주(上州)와 하주(下州)가 상대적인 의미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그 뜻을 빌렸음을 의미한다. 즉 상주는 낙동강의 상류 지방을, 하주는 낙동강의 하류 지방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고대 문명은 강의 흐름과 일치한다. 상주 지역은 공검지라는 큰 못이 이미 삼한시대부터 있어왔다. 양쪽의 높고 낮은 산이 둘러싼 좁고 긴 땅이 공검이다. 특히 북서쪽은 비교적 높은 산악이 있어 물이 충분히 흘러내린다. 여기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동남쪽으로 흘러가는 자연하천을 만들고, 그 출구에 제방을 쌓아 만든 것이 삼한 시대의 큰 못인 공검지이다. 공검지는 지금의 사벌, 상주 지역의 평야지대에 농수를 공급하였다. 이를 통한 부의 형성이 고대 왕국인 사벌국을 낳고 기르는 힘이었을 것이다.

 

 

 

3. 상주(尙州)

 

상주(上州)에서 상주(尙州)로 지명이 바뀐 것은 경덕왕 16, 757년이다.

경덕왕 때에 상주(尙州)로 지명이 바뀐 이후 경덕왕 바로 다음의 국왕이었던 혜공왕 때에(765~780) 다시 사벌주로 지명이 변경되었다. 새로 바뀐 지명이 어색했고 경덕왕의 잇따른 개혁 정치에 대한 귀족 세력의 반발을 짐작하게 한다. 그 이후 약 150여 년간을 다시 사벌주로 불리던 것이 고려 태조 23(940)에 상주(尙州)로 바뀌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983년에(성종 2) 지방 제도를 정비하면서 상주는 전국 12()의 하나가 되었고, 1019(현종 9) 전국 8목의 하나인 상주목으로 고쳐져 조선 초기까지 계속되었다. 지금도 상주가 교통의 중심지로 각광받고 있지만 지리적으로 많이 불편하였던 그 당시에 전국 사방으로 통하는 국토의 중심이며 낙동강의 물류 이동과 조령 등의 길을 확보하고 있던 상주의 중요성은 수도가 경주에서 개성 등 경기도 지역으로 바뀐 시기에도 매우 중요하였음을 의미한다. 조선 세종 때에 경주와 함께 상주에 경상도 감영(監營)이 설치되었고 1459(세조 5)에 진()이란 군사적 목적의 조직이 설치되면서 경상도의 중심지가 되었다. 1593(선조 26) 임진왜란 중에 경상도의 감영이 대구로 옮겨감에 따라 상주는 목()으로 격하(格下)되었다. 전쟁의 위기 상황에서 경상도의 지리적 중심으로 상주가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1895(고종 32) 23()제의 실시로 상주목은 상주군으로, 함창현(咸昌縣)은 함창군으로 달리 부르게 되었다. 1914년 부면이 통합될 때에 상주군과 함창군은 상주군으로 통합되어 18개 면()을 이룬다. 인구의 증가로 19314월 상주면이 상주읍으로, 198012월 함창면이 함창읍으로 승격하였다. 특히 대전과 같은 시기에 읍이 된 상주가 현재는 대전과 현격한 규모의 차이를 보이는 것은 도로교통 등에서 소외되어 공업화가 뒤쳐진 때문이라 생각되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인구의 증가에 따라 19861월 상주읍이 상주시()로 승격되어 상주군과 분리되었으며, 19894월 상주군의 화북 남부출장소가 화남면으로 승격됨에 따라 상주군은 117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19951월 상주시와 상주군이 상주시로 합쳐지면서 현재 상주는 도농복합형(都農複合形)의 도시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4. 상주의 기타 지명(地名)

 

 

상주를 이르는 이름으로 상산(商山), 낙양(洛陽) 등이 있다. 상산은 중국 진()나라 말기에 난세를 피해 산시성 상산에 숨어 살았던 동원공, 하황공, 용리선생, 기리계 등 노고사를 이르는 상산사호(商山四皓)에 비롯된 이름이다. 이들의 수염과 눈썹이 모두 희기 때문에 사호라 한다. 상주를 언제부터 상산이라 부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문의 영향이 미치기 시작한 고려 초기 이후로 짐작된다. 속리산이나 백화산, 작약산, 갑장산 같은 훌륭한 산과 낙동강이란 큰 강이 자리 잡은 상주 지역은 세상의 난을 피해 은자들이 학문을 하고 인격을 수양하며 세월을 보내기 위한 장소로 어울렸기에 이와 같은 지명이 붙여졌을 것이다. 이후 조선 시대에 이르러 상주 지역의 선비들이 만든 상주에 대한 기록을 담은상산지(商山誌)등에 그 용례를 엿볼 수 있다.

 

또 낙양이란 이름도 있다. 낙양은 현재 중국 허난성의 직할시이다. ()나라 무왕이 상()나라 주왕을 물리치고 구정(九鼎)을 옮겨 두었던 곳이 주나라 땅인 낙읍(洛邑)인데, 이후 낙읍은 낙양으로 일컬어진 주나라의 수도이다. 낙읍을 낙양이라 처음 부른 것은 전한(前漢) 시대 성주(城主)가 머문 곳을 낙양이라 칭하였고 후한(後漢) 때에 낙양이 한의 수도가 되었다. 이후 위()()()나라의 국도(國都)로 고대 시기 중국의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이후 낙양은 번화한 도시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이와 같은 의미가 우리나라에도 전파되어 상주를 낙양이라 부르게 되었을 것이다. 고대 부족국 시대부터 번화하였던 상주 지역이 신라고려 시대에도 경주와 개성 같은 수도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국토의 중앙에 위치하는 지리적 이점과 교통의 중심, 물자의 풍족함 등으로 말미암아 두 번째 도시로서의 위상이 확고하였을 것으로 본다. 이로 인해 상주의 별칭으로 중국의 수도이며 이후 동양 한자문화권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의 대명사가 된 낙양이란 명칭이 생겨난 것이다. 언제부터 낙양이란 별칭이 사용된 것인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한문의 영향이 본격적으로 미치기 시작한 신라 말기나 고려 초기로 짐작된다. 지금도 상주에는 낙양동(洛陽洞)이란 지명이 있어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또 낙동강(洛東江)은 상주의 옛 지명인 상락(上洛)과 별칭인 낙양(洛陽)의 동쪽에 위치한다하여 낙동강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상주의 별칭인 사불과 사량벌은 사벌의 이칭이며, 상락(上洛)은 중국 산해경의 상락지수(上洛之水) 에서 왔으며 여러 개의 지류가 만나 비로소 강다운 강이 되는 지리적 특징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렇게 상주(尙州)란 명칭은 오랜 세월 간 부침(浮沈)을 거듭해왔으며 지금도 그 세월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 권택룡, 상주 지명연구(상주고등학교,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