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충공파
휘 득배(得培)
고려 좌대언 증 원충단력안서보정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문하시중 상성군(商城君) 록(祿)의 장자이다.
자는 국자(國滋) 호는 난계(蘭溪)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문충공파의 파조가 된다.
고려26대 충선왕 4년 임자년(1312년)에 출생하며 31대 공민왕 11년 임인년 3월 51세로 별세하셨다.
수충보절정원공신이며 정당문학 도병마사를 지내고 상락군(上洛君)의 봉작을 받았다. 19세에 고려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 전개부령을 거쳐 28대 충혜왕이 원나라에 들어갈 당시 배행하며 숙위하고 경진년에 충혜왕이 환국하여 복위하자 우부대언이 되고 공민왕 6년 정유년 서북면 홍건적과 위정방어 도지휘사 추밀원직학사 전북면도 순문사 겸 서경윤상만호가 되었다. 역적 기철을 복주하여 2등공신이 되고 공민왕 8년 12월 8일 모거경등 사만여명의 홍건적이 내침하자 공은 총 도원수로 부원수 경천흥 등과 함께 방어에 힘썼으나 마침내 서경이 함락되었다.
공은 이방실 장군과 함께 역습 분전하며 거의 섬멸하니 도강 패주자는 겨우 300명이라 하였다. 공민왕 10년 10월 주원수 파두번 번성 사유관선생 등 홍건적이 10여만의 대군을 이끌고 재침하며 자비령 방책을 무너뜨리고 개경을 함락 시켰다. 공은 서북면 도병마사로서 안우 이방실 최영 이성계등과 제장과 힘을 합하여 20만의 정예군으로 개경을 포위 공격하여 적장 사유관선생을 비롯 10여만을 도륙하고 잔적이 압록강을 건너 달아나게 하였다.
서경과 개경전투에는 두 아우 득제 선치와 족제인 운보 신보가 참전했는데 공과 두 아우를 세칭 삼원수라 한다. 이때 통병관 정세 운고 권력을 다투던 참지정사 대역간신 김용이 복주(안동)로 파천해 있던 공민왕을 모시고 있다가 공을 비롯한 여러 장수의 전공을 시기하여 먼저 왕명이라 사칭하며 안우로 하여금 충병관 정세운을 죽이게 하고 주장을 죽였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 안우도 죽였다. 공은 문경 산양현으로 피신해 있다가 김용이 보낸 사람에게 잡혀 상주에서 처형되었으니 천추에 남은 원한이다.
공의 문하생인 포은 정몽주 선생이 왕에게 주청하여 시신을 거두고 제문과 만시를 지어 상주 남쪽 10리허에 예장하였는데 묘소는 여조쇠망과 함께 실전되었다. 경기도 파주군 마전에 있는 숭의전과 상주 옥성서원에 배향되었고 공의 6세손 도사공 정필이 경북 금릉군 어모면 여남 내동 갑좌원에 설단하고 충의재(忠毅齋)라 편액하였으며 비를 세웠는데 경술년에 시려 황난선이 비명을 찬하 고 종후손 국원이 쓴 비를 다시 세워 10월 1일 제향하고 있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병감 조선인명서 한국인 명대사전 저선명신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