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낙성군파

 

휘 선치(先致)

 

 

추중보절찬화공신으로 중대광낙성군(洛城君)에 봉군되시고 시호는 문충(文忠)이시다. 고려27대 충숙왕 무오년(1318) 1015일에 탄생하셨으며 17세로 나주판관에 배수후육위랑장으로 왜구를 격퇴시키는데 공이 있으셨다.

 

고려31대 공민왕 8년 기해년(1359)에 행촌이암(杏村李碞)장군 막하에 종군하여 홍건적을 방어할 때 도원수 이암이 적의 군량을 끊기 위해 나라의 곡식창고를 불태우라고 명하려 하자 공께서 왈 만약 창고의 곡식을 불태우면 적은 군량을 구하고자 갑자기 나라 깊숙이 침입할 것이니 상계책이 아니라고 진언하니 도원수가 이에 따랐다고 한다. 그 후전법판사에 배수되시고 홍건적을 평정하신 훈공이 너무나 높으므로 초상을 벽상에 높이 거는 일등공신에 기록되시고 그 뛰어난 공으로 부모님과 배위는 삼등공신으로 봉작되시고 또 아드님 한분의 벼슬은 7품격인 이부시랑에 선임되시고 전리판서로 양광도(지금의 경기도 일부)에 부임안무하셨으며 동북면도순문사를 위시하여 밀직부사계림부윤 전라도 도순문사를 역임하셨다.

 

처음에는 상성군에 봉군되시고 추성익위공신으로 추대받으시고 한편 백형득배 중형득제와 함께 세간에서는 소위 삼원수(三元帥) 집안으로 칭호되었다. 고려의 국운이 극에 이르자 두문동에 들어가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키시고 뒤에 상주산 양현으로 물러나 은거하셨다.

 

고려사 열전을 보면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선생은 일찍이 다음과 같은 한시를 지어 전하기를 '우중에 내가 머무르니 술잔에 정은 깊어지고 짧은 반나절의 고담준론은 백량의 금보다 귀하도다. 다만 임금님 뵈옵기가 바빠가는 말을 재축하니 석양의 방초가 나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구나' 태조 7년 무인년(1398) 322일에 서거하시니 향년 81이시다. 동원 정호선은 묘제문에 약술하기를 '산천의 정기모여 좋은 집안 터전되고 종묘사직 맑게 하니 그 공은 높은 산과 같도다'라 하였고 목제홍여하(木劑洪汝河)는 많은 사서를 보고 논하기를 '덕망과 훈업은 백씨에 버금하며 수복의 공은 같으나 화는 함께하지 않았도다'라고 하였다.

 

묘소는 상주 개운동 임좌이시고 숙종 21년 을유년(1705)에 후손 연()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시 비문을 짓고 판관 이징해()의 글씨로 음각하여 신도비를 세우셨다. 그 후 경종 5년 갑진년(1724)에 후손 동필(東弼)이 경상도 관찰사로 도임하여 또 묘표를 세우니 명필의 백하 윤순(白下 尹淳)이 글씨를 쓰고 옛표석은 상석왼쪽에 묻었다.

 

또다시 경오년(1990)에 후손들의 성금으로 비석과 석불을 갖추어 세웠다. 상주 귀호서원에 배향되시고 배위는 김제 조씨이며 파문 하사사와 보문각학사영회의 따님이시고 대호군지의 손녀이시며 진사연벽의 증손녀이시고 양어깨에 물고기 비늘같은 문양이 있으셨다. 기일은 429일이며 묘소는 개운재사와 같은 산서편 임좌에 자리하시고 묘표는 후손 광우(光遇)가 상주목사로 재임시(1730)에 세우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