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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지 상주의 연혁




상산김씨 시조 휘 수() 할아버님

 

상주(상산)지역의 학문적 연원과 문화는 우리 김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김문은 고려에서부터 충신과 열사가 끊이지 않고 조선과 근현대에 이어 오면서 명문의 면모를 잃지 않고 있다.

 

상산김씨의 시조인 휘 수()께서는 신라 말과 고려 초기에 활동하였다. 고려 초기에 보윤을 지냈으며, 일부 문헌에는 시중(侍中)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상고 할 수 없다. 묘소는 세월이 오래되어 실전하였다. 그래서 1962년 경향의 자손들이 뜻을 모아 상주시 신봉동에 단을 만들어 매년 양력 55일에 향사한다.

 

2세 휘 도()시조 보윤공 휘 수()의 아들, 보윤(甫尹), 대장군(大將軍)을 지냈다.

 

3세 휘 식()보윤(甫尹) 휘도()의 아들, 시중(侍中)이며 시호는 정정()이다.

 

4세 휘 희일(希逸)시중(侍中) 휘 식()의 아들, 시중(侍中)이며 상산군(商山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청명(淸平)이다.

 

5세 휘 문도(文道)시중(侍中) 휘 희일(希逸)의 장자, 시강원 한림학사(侍講院翰林學士)이다.

5세 휘 문궁(文躬)시중(侍中) 휘 희일(希逸)의 차자, 시중(侍中)이다.

5세 휘 비궁(匪躬)시중(侍中) 휘 희일(希逸)3,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역임하고 벽상공신(壁上功臣)에 올라 상산부원군(商山府院君)에 봉해졌다.

 

6세 휘 걸()한림학사(侍講院翰林學士) 휘 문도(文道)의 아들,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6세 휘 치화(致和)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휘 비궁(匪躬)의 장자, 정당문학(政堂文學) 첨의평리(僉議評理)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다.

6세 휘 치원(致遠)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휘 비궁(匪躬)의 차자, 문하판사시중(門下判事侍中)이다.

 

7세 휘 유()진사(進士) 휘 걸()의 장자, 예문·춘추관 응교(藝文春秋館應敎)와 시강원 한림학사(侍講院翰林學士)에 올랐다.

7세 휘 우()정당문학(政堂文學) 휘 치화(致和)의 아들, 고려 명종조 국자감시(國子監試)에 장원하였고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

7세 휘 려()시중(侍中) 휘 치원(致遠)의 아들, 문하찬성사(門下成事)를 지내고 벽상공신(壁上功臣)에 올라 상산부원군(商山府院君)에 봉해졌다.

 

8세 휘 지연(之衍)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 휘 유()의 장자, 시강원 한림학사(侍講院翰林學士), 한림원승지(翰林院承旨)이다.

8세 휘 수규(受規)자헌대부(資憲大夫) 휘 우()의 아들, 문과에 급제하였다.

8세 휘 충()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휘 려()의 아들, 고려 원종(元宗)4번이나 왜적을 토벌한 공로로 오성군(筽城君)에 봉해졌다. 동국사기(東國史記)에 의하면 '지략은 천하에 으뜸이며, 동방의 관중이요, 재갈공명같이 대중을 통솔하며 왜적을 섬멸하고 토벌하였다.'고 한다. 뒤에 증손 휘 운보(云寶)가 귀하게 되어 이조참판(吏曹叅判)에 증직되었다.

 

9세 휘 분()시강원 한림학사(侍講院翰林學士) 휘 지연(之衍)의 장자, 한림학사(翰林學士)이다.

9세 휘 일()시강원 한림학사(侍講院翰林學士) 휘 지연(之衍)의 차자, 1273(고려원종 14) 별장(別將)으로 원나라에 들어갔고 돌마와 수충병의 협찬공신 중대광 찬성사 대장군(輸忠秉義協贊功臣重大匡贊成事大將軍)을 역임하였으며 상성군(商城君)에 봉해졌다.

9세 휘 감()시강원 한림학사(侍講院翰林學士) 휘 지연(之衍)3, 병부 전서(民部典書)이다.

9세 휘 유요(惟堯)문과(文科) 휘 수규(受規)의 아들, 판군기감사(軍器監事), 대장군(大將軍)이다.

9세 휘 자송(子松)중랑장(中郎將) 휘 충()의 장자, 1325(충숙왕 12)에 임시직으로 신호위 보승중랑장(神虎衛保勝中郎將)에 올랐으며, 뒤에 손자 휘 운보(云寶)가 귀하게 되어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증직()되었다.

 

10세 휘 축()시강원 한림학사(侍講院翰林學士) 휘 분()의 장자,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예부전서(禮部典書)이다.

10세 휘 한()시강원 한림학사(侍講院翰林學士) 휘 분()의 차자, 예부시랑(禮部侍郞), 예부낭중(禮部郎中), 예부상서(禮部尙書)이다.

10세 휘 록(祿)상락군(上得君) 휘 일()의 장자, 1266(충렬왕 22)에 문과에 급제한 뒤 원나라에 들어가 진사과에 합격하고 귀국하며 호군(護軍)으로 임명되었다. 하루는 큰 비가 내려 사평교(司平橋)가 물속에 잠겨 사람들이 건너지 못하였는데 공이 몸을 날려 사람들을 건너게 하였다. 의종(毅宗)이 그 일화를 듣고서 공을 입궐케 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내 이미 너의 용력을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저 전각위에 달려있는 독수리 머리를 떼어 올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공은 전각의 끝을 잡고 나는 듯 위로 올라가 조각된 독수리 머리를 떼어 오자 의종께서 큰 장사라 칭찬하였다. 뒤에 김해부사(金海府使)와 평양부사(平壤府使)를 거쳐 1309(충선왕 1에 도평의록사(都評議錄事)로서 경상도염찰사(慶尙道廉察使)을 역임하고 좌대언(左代言)에 올랐다. 원충단력안사보정공신(元忠端力安社保定力臣) 벽상삼한삼중대광문하시중(壁上三韓三重大匡門下侍中)에 증직되고 상성군(商城君)에 봉해졌다.

10세 휘 실()병조전서(兵曹典書) 휘 감()의 장자, 병부전서(兵部典書)이다.

10세 휘 위()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휘 유요(惟堯)의 장자,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10세 휘 언()중랑장(中郞將) 휘 자송(子松)의 아들, 충숙왕의 특별한 부름을 받아 낭장(郎將)이 되었고 1360(공민왕 9)에 판장군(判將軍)과 별장(別將)에 올랐으며 뒤에 아들 휘 운보(云寶)가 귀하게 되어 우의정(右議政)에 증직되었다.

 

11세 휘 인통(仁通)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휘 축()의 장자, 이부상서(吏部尙書)이다.

11세 휘 계근(戒根)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휘 축()의 차자, 봉덕군(奉德君)에 봉해졌다.

11세 휘 원리(元理)예부상서(禮部尙書) 휘 한()의 장자, 음사로 벼슬길에 올라 전공 판서(典工判書)와 호조 전서(戶曹典書)등을 역임하였다. 고려 왕조가 말기에 접어 국운이 다함을 보고 폐단을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이미 몸이 늙어 충성을 다하지 못하게 되어 벼슬을 사양하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이에 임금께서 그 뜻을 아름답게 여겨 화공으로 하여금 형상을 그리게 하고 자손들에게 주어 간직케 하였는데 임진왜란을 당하며 충주(忠州) 유천포(酉川浦)에서 잃게 되었다.

11세 휘 만리(萬理)예부상서(禮部尙書) 휘 한()의 차자, 판서(判書)이다.

11세 휘 득배(得培)상성군(商城君) 휘 록()의 장자, 자는 국자(國滋), 호는 난계(蘭溪)이다. 어려서 불훤재(不諼齋) 신현(申賢)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330(충숙왕 16)19세로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과 전객부령(典客副令), 충혜왕 강릉대군(후일 공민왕)이 원나라에 들어갈 때 호종 숙위하였다. 1532년에 공민왕이 환국하여 즉위하자 우부대언(右副代言)에 제수되었으며, 1357년에 서북면에 침입한 홍건적과 왜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도지휘사(都指揮使)가 되었다가 이어 추밀원직학사(樞密院學士)에 오르고, 서북면 도순문사 겸서경윤상만호(西北面都巡問使兼西京尹上萬戶)가 되었다. 1359년 정월에 첨서추밀원사(僉書樞密院事)가 되었으며, 그 해 6월에 기철(奇轍)을 숙청한 공으로 2등 공신에 올랐다. 같은 해 10월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가 되었다. 이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홍건적의 괴수 위평장(僞平章) 모거경(毛居敬)4만 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함락하였으며, 부사(副使) 주영세(朱永世) 및 주민 1,000여 명을 살해하였다. 이어 정주(靜州)에서는 도지휘사 김원봉(金元鳳)을 죽이고 인주(麟州)까지 함락시켰다. 이 때 공은 도지휘사가 되어 서북면도원수 이암(李碞), 부원수 경복흥(慶復興)과 더불어 적에 대비하고, 안우(安祐이방실(李芳()) 등과 함께 분전하여 서경를 탈환하고 압록강 밖으로 적을 격퇴시켰다. 13603월에 그 공으로 수충보절정원공신(輸忠保節定遠功臣)에 책봉되고,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제수되었다. 같은 해 10월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급제자를 뽑았는데 정몽주(鄭夢周) 33인을 급제시켰다. 1361년 정당문학으로 도명마사를 겸하였다. 이해 10월 다시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삭주 이성(泥城)으로 침입하자 서북면도병마사(西北面都 兵馬使)가 되어 상원수 안우, 도지휘사 이방실 등과 함께 이를 방어했으나 안주에서 대패 개경까지 함락 당하였다.

다음해에 안우·이방실·최영(崔瑩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2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총병관(總長官) 정세운(鄭世雲)의 지휘로 적의 괴수 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 등을 베고 적 10여 만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리고 이들을 격퇴시켰다. 이때 정세운과 권력을 다투던 평장사 김용(金鏞)이 거짓으로 조서를 꾸며 공을 비롯하며 안우·이방실에게 정세운을 살해할 것을 명하자 공은 불가함을 말하고 문경 산양으로 내려왔으나 안우·이방실이 그것을 믿고 정세운을 살해하였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하며 안우·이방실이 살해되었으며 공도 산양현(山陽縣)에 체포되어 상주에서 효수되었다. 얼마 뒤 제자 직한림(直翰林) 정몽주는 왕에게 청하며 시신을 거두고 제문(祭文)과 만시(輓詩)를 지어 상주 남쪽 10리쯤에 예장하였는데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경기도 파주군 마전에 있는 숭의전(崇毅殿)과 상주시 옥성서원(玉城書院)과 파주 고려대전(高麗大殿)에 배향되었다.

11세 휘 득제(得齊)상성군(尙城君) 휘 록(祿)공의 차자, 1345(충목왕 1) 4월에 십운시문과(十韻詩文科)에 장원급제하셨다. 1361(공민왕 10)에 홍건적이 20만 대군으로 침입하며 개경이 함락하자, 추밀원직학사(樞密院直學士)로 왕의 어가를 호종하여 안동으로 피난하였는데 이때 대장군(大將軍)에 임명되어 적군를 격파하고 곤경에 빠진 백성를 구제하셨다. 다음해 판각문사(判閣門事)가 되어 개경을 수복하는데 공이 커서 추충분의안사좌명공신(推忠奮義安社佐命功 臣) 중대광(重大正) 삼사우사(三司右使) 도형벽상(圖形壁上) 1등 공신에 오르고, 전답 100결과 노비 10구도 하사 받았다.

그러나 당시 간신 김용이 흉계를 꾸며 백형(伯兄) 정당문학(政堂文學) 김득배(金得培)를 살해하자. 이에 연좌되어 화산(花山)으로 유배되었다. 1353(공민왕 2)에 간신 김용을 처형되자 관직을 돌려주었다. 1376(우왕 9)에 의주원수(義州元帥)가 되었으며 이듬해 10월에 왜구가 영주(寧州)와 아주(牙州)에 침입하자, 왕안덕(王安德목충(睦忠) 등과 함께 격퇴하였다. 1378년에 왜구가 해주(海州)와 평주(平州)까지 침입하자, 최영(崔瑩이희필(李希泌양백연(楊伯淵)등과 함께 격퇴하였다. 그 뒤 삼사우사(三司右使)가 되었다. 또 왜구가 영산(寧山)과 밀양(密陽)에 침입하자,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이성계(李成桂이림(李琳류만수(柳曼殊) 등과 함께 우인렬(禹仁烈)를 도와 격퇴하였는데 적장 사불낭송지(沙弗浪松旨)는 지리산에 이르러 항복하였다. 이 전투에서 공으로 상산군(商山君)에 봉해졌다. 1381년에 왜구가 다시 진포(鎭浦)와 한주(韓州)에 침입하여 왕안덕(王安德)이 구원병을 청하므로 왕명을 받고 출전하여 격퇴하였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두 임금을 섬기기 싫어 고향으로 낙향하며 숨어 살았으며 뒤에 태종조에 이르러 다시 상산군(商山君)에 봉해졌다. 공은 형 난계(蘭溪), 김득배(金得培)와 아우 낙성군(洛城君) 선치(金先致)와 함께 문장과 덕행이 당세에 출중하였고,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적에는 함께 대의를 부르짖으며 출전하여 남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토벌하니 세상 사람들이 '삼원수(三元帥)'라 하였다. 용인 정암서원(正巖書院)과 파주 고려대전(高麗大殿)에 배향되었다.

11세 휘 선치(先致)상성군 휘 록(祿)공의 3, 17세에 나주판관(羅州判官)에 임명되고 이어 낭장(郎將)으로 전라도도순문사(全羅道都巡問使) 유탁(柳濯)을 따라 왜구를 격퇴했으며, 그 뒤 호부낭중(戶部郎中)이 되었다. 1359(공민왕 8)에 도원수(都元帥) 이암(李碞)을 따라 홍건적을 막으러 서경에 갔을 때 이암이 서경을 지키지 못할 것을 알고 창고를 불태우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그는 창고를 불태우면 적이 식량을 얻기 위해 오히려 전국에 침입할 것이니 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반대해 이를 중지시켰다. 1363년에 홍건적을 평정시킨 공으로 1등공신이 되어 그 형상이 벽상(壁上)에 그려졌고, 토지와 노비가 하사되었다. 뒤이어 이부시랑(吏部侍郎)이 되어 양광도(楊廣道)를 안찰(按察)하였다. 그 때 재상이 남경(南京)의 궁궐을 헐어 백악(白岳)으로 옮기려 하자, 왕에게전날 남경을 지을 때 사람과 짐승이 피곤했는데, 이제 다시 헐면 백성들이 실망할 것입니다."라고 의견을 밝혀 왕이 놀라 그 일을 중지시켰다. 전리판서(典理判書)를 거쳐 1365년에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가 되었다. 그 뒤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계림부윤(鷄林府尹)이 되었다. 이때 오래 해결하지 못한 강도사건과 그 연루자 1백여 명에 대해 처결을 내렸다. 이후 상성군(尙城君)에 봉해지고 추성익위공신(推誠翊衛功臣)이 되었다.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올라 전라도도순문사(全羅道都巡問使)가 되었고, 1373년에 삭방도도순문사(朔方道都巡問使)가 되었다. 1378(우왕 4)에 낙성군(洛城君)에 봉해지고, 추충보절찬화공신(推忠保節贊化功臣)이 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절의를 지켰고 뒤에 상주 산양현(山陽縣)으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상주 구호선원(龜湖書院)과 파주 고려대전(高麗大殿)에 배향되었다.조선왕조실록에 졸기(卒記)가 전한다.

11세 휘 유화(有和) 병부전서(丙部典書) 휘 실()의 아들, 전교제학(典敎提學)이다.

11세 휘 득화(得和)진사(進士) 휘 위()의 아들, 음사로 벼슬길에 올라 내원서령(內苑署令)이 되었다. 1362(공민왕 10)에 원()나라에서 공민왕(恭王)을 폐하고 충선왕(忠宣王)의 셋째 아들인 덕흥군(德興君, 塔思帖木兒)으로 바꾸려 할 때 기황후(奇皇后)의 친족인 기삼보노(奇三寶奴)를 원자(元子)로 삼아 요동군사와 함께 고려(高麗)를 침공하였다. 당시 덕흥군이 침공하자 좌정승(左政丞) 최유(崔儒)는 덕흥군을 옹위하고 원나라 군사와 함께 압록강(鴨綠江)를 건너 의주(義州)를 포위하니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때 공은 안우경(安過慶) 막하(幕下)에 호군(護軍)이 되어 압록강(鴨綠江)변을 수색하고 기마 70여기를 거느리고 적이 포위하고 있던 궁고문(弓庫門)으로 달려갔다. 안우경(安過慶)를 지휘관으로 하고 공은 방천명(邦天命함석주(咸石柱)등과 합세하여 적들과 7번에 걸친 싸움에서 원나라 군대를 모두 물리쳤으나 결국 홍선(洪瑄)이 생포되어 패주하고 안주(安州)로 퇴각했으며 선주(宣州)가 점령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공은 정예기명 3백 명과 함께 정주(定州)에 진출한 원나라 척후기병을 공격해서 패퇴시키고 원군(元軍)의 장수 송신길(宋臣吉)을 포살해 조리를 돌려 원군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이로 민해 고려군(高麗軍)은 반격에 나서게 되고, 공은 다시 이성계(李成桂최영(崔瑩)등과 합세하여 18일 수주(隨州달천(獺川)에서 일대 회전을 벌여 원나라 군대를 대패시키고 악당 최유(崔儒)의 군사를 압록강 밖으로 몰아냈는데 북경까지 살아서 돌아간 자가 17명 밖에 되질 않았다.

11세 휘 운보(云寶)낭장(郎將) 휘 언()의 장자, 처음 휘는 벌대(伐大)였다. 중국 황조로부터 '()'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으며 자는 광국(光國)이고 호는 죽헌(竹憲)이다. 고려 말에 중랑장(中郞將)으로 왜적을 토벌하고 경성수복 전투에 나갔다. 이 공로로 전답 50()을 하사 받고, 공민왕이 고을 관장에게 명하여 공적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조선이 건국되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11세 휘 신보(臣寶)낭장(郎將) 휘 언()의 차자, 자는 의중(義重)이다. 1361(공민왕 10) 평안도 의주군에서 홍건적를 격퇴하여 공을 세워 충무위 보승중랑장(忠武衛保勝中郞將)에 오르고, 강원도 횡성군 강림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 1374년 제주에서 호목(湖牧)이 반역하니 이를 평정하였으며 1376(우왕 2)에 최영 등과 함께 충청도 부여 홍산대첩(鴻山大捷)에서 왜구를 섬멸시켰다. 1377년 황해도 해주에서 왜선을 격퇴하여 이 공으로 도통사(都統使)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 태조 이성계가 등극하자 곧 관직을 버리고 남쪽 오성(筽城)으로 내려왔다. 태조가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까지 나가지 않았다. 파주 고려대전(高麗大殿)에 배향되다.

11세 휘 천경(天擎)휘 김영(金瑛)의 아들.